어느덧 결혼을 하고 1년이 넘게 지났군요. 말인즉슨 제가 요리를 취미로 하게 된지도 거의 1년이 되어간다는 것이네요.
하여 예전부터 쓰자 쓰자 하다가 계속 미루기만 한 요리를 취미로 한다는 것에 대해서! 적어보려고 합니다. 일반론적인 얘기는 아닌 것 같고 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입니다. 나눠 쓰려다가 질질 끌어질 것 같으니 좀 길어도 한번에 써보렵니다.
일단 저희집은 취미와 적성에 따른 자연스러운 역할분담의 결과, 요리는 거의 제가 하고 청소는 거의 아내님이 합니다. 빨래와 설겆이 등등 그 외 집안일은 적당히 나눠서 하는 정도.
결혼 전 요리에 대한 지식과 실력은 둘이 비슷했다고 생각하는데, 어쩌다보니 자연스럽게 제가 하게 되더군요. 결혼 직후 아내님의 회사와 직장이 아주 멀어서 (지금은 아님) 제가 요리를 주로 하게 된 것도 그런 흐름에 일조한 것 같지만 꼭 그게 아니더라도 이렇게 되었을 것 같습니다.
사실 요리를 취미로 한다는건 쉬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예전에 자취생활때 요리를 꾸준히 하려다가 1년을 채 못가고 포기한 적이 있죠. 요리가 어려워서가 아니라 많은 조건이 받쳐주지 않으면 꾸준히 하기 힘들기 때문인데... 생각해보자면
1. 나의 주방과 냉장고가 필요하다.
- 필수는 아니지만... 항상 어머니께서 해주시는 밥 먹다가 주말에 갑자기 요리하려고 하면 냉장고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겠고 주방도구도 어딨는지 모르겠고 그렇다고 다 사다가 하기도 좀 그렇고... 이런게 많죠. (계속 물어가면서 하기도 좀 그렇고..) 정말 꾸준히 하려면 자기 주방과 냉장고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2. 맛있게 같이 먹어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 두가지 이유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혼자 해서 혼자 먹는건 왠지 흥과 의욕이 잘 안난다는 것. 아무래도 혼자서는 적당히 때우게 되기 쉬운 것 같습니다. 같이 먹는 사람이 '맛있게' 먹어줘서 만들어 먹이는 보람이 있으면 요리할 의욕이 더 나는건 당연한 거겠구요. (그런 면에서 아내님은 아주 훌륭한 파트너입니다.)
두번째는 아래 이유의 일부입니다.
3. 꾸준한 속도로 식재료를 소비할 수 있어야 한다.
- 음식 재료는 당연하게도 냅두면 상하고, 한번에 일정 분량 이하로는 팔지 않거나 비쌉니다. 즉 일정한 속도로 먹어주지 않으면 버리는 양이 너무 많아서 지속하기가 힘들어집니다.
이 조건을 만족하려면 일단 먹는 사람이 어느정도 필요하고 (혼자서는 쉽지 않습니다... 단 요리에 능숙하고 재료를 냉동해서 보관하는데 익숙하면 가능은 할듯) 잦은 야근 등으로 꾸준히 집밥을 먹을 수 없는 상황이 아니어야 합니다. 예전에 자취할 때 요리를 포기한 가장 큰 이유.
이정도이려나요. 특징이라면 인위적인 노력으로는 충족시키기가 힘든 반면 어느 상황에서는 자연스럽게 (ex : 결혼) 조건이 만족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반면 가능한 조건이 된다면 요리는 정말 비교할 것이 별로 없을 정도로 훌륭한 취미이기도 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요리의 장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1. 가사 노동으로 인정받고 예산도 지원받음
- 정말 최강의 강점입니다... 취미이지만 노동으로 인정받고 생활비로 즐길 수 있다! 게다가 요리를 안하고 사먹을 경우와 비교하면 실질적으로 드는 돈은 마이너스라고 봐도 됩니다. 취미 치고 엄청나게 싼 게임과 독서도 이건 못따라옵니다. 그리고 당연히 취미에 몰두하더라도 누구도 눈총을 주지 않습니다.
2. 지속 가능하다
- 이건 플라모델이나 레고 같은 취미와 비교했을 때입니다. 플라모델이나 레고는 참 재밌지만... 취미의 결과물이 쌓입니다! 이걸 감당하기 힘들어져서 지속 가능성에 한계가 있는데 (계속 팔아치울 수도 있긴 하겠지만) 요리는 결과물이 꾸준히 사라진다는 면에서 지속 가능합니다.
3. (돈을 많이 안써도) 깊이가 있다.
- 돈을 많이 들이지 않아도 깊이를 추구할 수 있습니다. 다른 많은 취미들이 깊이를 추구할수록 돈을 쏟아붇게 되는 것과는 큰 차이입니다. 물론 특별한 재료나 요리도구가 필요한 음식도 있겠지만 꼭 그런 요리를 해야 깊이가 있는건 아니니까요. 일단 요리는 역사만 봐도 어떤 취미보다 (독서보다도 운동보다도...) 길죠. 인류가 불을 발견한 이래일테니... 맘만 먹으면 평생 같은 요리를 한번도 안하는 것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부지런해야겠지만. 지금 내가 했던 요리를 수백년 전 사람들도 해먹었겠지 하고 생각하면 뭔가... 인류의 유산같은걸 이어받고 있는 것 같아서 기분이 묘할 때가 있어요.
4. 건강에도 좋고 주변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
- 사먹는 것에 비해 (대체로) 건강에도 좋고, 주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것도 장점입니다.
올해 초에 아버지께서 편찮으셔서 수술 후 요양중이셨는데 다른 음식을 드시기 힘들 때 끓여서 갖다드린 감자스프를 요긴하게 드셨다는 얘기를 듣고 요리를 하길 정말 잘 했다 생각했지요.
반면 하기 귀찮을 때도 해야 된다는 건 단점일 수 있겠습니다...만 정말 귀찮을 때는 적당히 사먹는 수도 있으니 -_-a 그렇게까지 강제성이 크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제 체감으로는.. (아이가 있다면 강제성이 좀 더 클 수는 있겠네요)
그런데 왜 저희집에서 아내님이 아닌 제가 요리를 하게 되었는가... 하면 위에서 말했다싶이 역시 취미와 적성에 따른 결과입니다. 물론 아내님도 요리를 괜찮게 하는 편인 만큼 해야 되는 상황이 되면 했겠지만... 상대우위로 제가 맡게 된 것이죠.
제가 생각하기에 요리를 꾸준하게 하기 위해 필요한 가장 큰 요소는 맛있는 것에 대한 욕심인 것 같습니다. 이게 없어서 식사는 적당히 배를 채우면 된다. 라고 생각하면 확실히 요리는 무지무지 귀찮기만 한 일일 것 같습니다... 그런 취향인데 요리를 할 수밖에 없는 입장에는 놓이고 싶지 않네요.
그리고 저는 원래 있는 반찬으로 적당히 먹는걸 별로 좋아하는 타입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뭔가 '주 요리'라고 할만한게 있어야 밥을 맛있게 먹는 편이라.. (한국식 식탁에는 잘 맞지 않죠) 자연스럽게 '뭔가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제가 먼저 하게 됩니다.
(청소에 있어서는 반대로, 깨끗한 것에 더 민감한 아내님이 '청소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먼저 합니다)
그리고 새롭고 신기한 걸 좋아하는 관계로 새롭고 맛있는 요리를 보면 '음 이것도 언젠가 한번 만들어 보고 싶은데'하고 생각을 하죠.
그리고 저는 어머니께서 요리를 하도 잘 하시는 편이라... 직접 배우지는 않았어도 영향을 많이 받은 부분이 있습니다. 특히 저희 어머니는 많은 사람들이 '식당에서 사먹는' 거라고 생각하는 음식도 집에서 다 만드시는 타입이라 (ex : 추어탕, 감자탕, 초계탕, 연포탕, 어리굴젓, 간장게장...) 저도 뭐든지 걍 만들어보면 되지 뭐 하고 생각하게 되네요.
조금 다른 측면의 재능도 있는데... 저는 원래 프로그래머이고 플라모델처럼 뭔가 '목표가 확실하고, 그걸 절차에 따라 조립해서 완성하는' 걸 좋아합니다. 요리도 이것과 일맥 상통하는 면이 있어서, 적성에 잘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프로그래밍도 '이렇게 만들면 이런게 나오겠군' 하고 미리 상상 (혹은 추리)해보는게 중요한데, 요리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결국 실제 조리를 하기 전에 결과물을 이미지화할 수 있어야 수월하게 만들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벌써 1년쯤 요리를 취미로 하고 있고.. 아직은 멀고 멀었습니다만 (롤모델은 아빠는 요리사의 일미 과장님) 앞으로 천천히 달성하고 싶은 과제들로는 이런게 있습니다.
1. 한번에 두가지 이상의 요리를 능숙하게 할 수 있다.
2. 레서피를 보지 않아도 만들 수 있는 요리(=재료와 요리법을 암기하고 있는)가 꽤 많이 있다.
3. 레서피를 보지 않고도 그때 그때 냉장고에 있는 재료를 적당히 꺼내서 적당한 요리를 만들 수 있다. (마스터 셰프 코리아 같은데 나오는 미션같군요)
4. 재료를 팍팍팍팍팍 빠른 속도로, 균일한 두께로 썰 수 있다. (은근히 재료 써는데 소모되는 시간이 많습니다)
5. 음식의 맛을 보고 재료와 만드는 법을 대충 유추할 수 있다.
그 외에 잡담을 하자면...
일단 요즘은 블로그에 레서피가 워낙 많이 올라와서 요리 취미로 하기는 상당히 편한 것 같습니다. 요리책을 좀 사도 잘 안볼때가 많네요. 몇가지 재료가 부족할 때는 비슷하지만 다른 재료를 쓰는 레서피를 찾아보기도 하고, 레서피 몇개를 참고해서 적당히 섞어서 할 때도 있습니다.
웹서핑을 하다가 괜찮은 레서피가 눈에 띌 때마다 즐겨찾기를 해두면 나만의 요리책 느낌이랄까. 뭐 만들까 싶을때 찾아보기 편해서 좋습니다.
요리를 처음 하면 역시 재료를 관리하는게 쉽지 않은 부분인데, 얼려서 보관하는 노하우를 알면 도움이 많이 되는 것 같습니다. 내용에 비해 좀 비싸긴 하지만 이런 책을 한권 봐두는 것도 괜찮은 듯 합니다.
요리를 취미로 하면 자기 먹을건 스스로 조달 가능하니까 뭔가... 자립심? 이라고 표현하면 좀 이상하지만 아무튼 자신감이 생기는 부분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내님이 없어도 혼자서 먹고 살 수 있다는 생각이 들고, 일이 너무 힘들어서 집에서 오래 쉬는 일이 생겨도 먹는거 대충 때우는게 아니라 제대로 해먹고 살 수 있겠구나. 이런 사실을 좀 의식하게 되는게 있네요. 아무튼 심리적으로 좋아요.
요리 취미와 편식..에 대해서는 양면적인 부분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단 내가 요리를 만들다보니 아무래도 내 입맛에 맞는 재료로 입맛에 맞는 요리를 하게 됩니다. 즉 편식이 어느 정도는 생기게 되는거죠. (저는 부모님께서 이거 갖다가 뭐 해먹으라고 싸주시는 재료가 있어서 그나마 조금 해소가 되는 편이긴 합니다만)
그런데 하나의 요리 안에서는 음식을 오히려 골고루 먹게되기도 합니다. 즉 옛날에 부모님께서 고기와 채소를 볶은 요리를 해주시면 아무래도 고기가 메인이고 채소는 곁다리라는 느낌이라 고기를 주로 먹게 되었는데, 내가 만들면 그 전체가 하나의 요리로 느껴지기 때문에 (그리고 일부러 내가 넣은 거니까) 채소도 균등한 비율로 골고루 먹게 됩니다. 이건 스스로도 예측하지 못해서 좀 놀랐던 경험이네요.
어째 좀 횡설수설한 글이지만 오랬동안 쓰려고 햇던 얘기를 다 써서 개운하네요. 그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