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사람 사이에 인연이 있듯이 사람과 음악, 혹은 공연 사이에도 인연이 있기 마련.

내가 Earth Wind & Fire에 대해서 처음 알게 된 것은 몇년 전 '언더커버 브라더'라는 영화를 보게 되서였다.

이 (극장 개봉도 안한 마이너한) 영화를 보게 된 계기도 간단하지 않은데, 예전에 밴드 아소토 유니온의 홈페이지에 (지금은 꼴데툰으로 유명하신) 샤다라빠님께서 '아소툰' 이란 만화를 그리신 적이 있었다. 언더커버 브라더는 그 만화에 소개된 영화였고 너무 재밌어 보여서 비디오를 빌려 봤다가 결국 DVD까지 구입하게 됐다. (DVD는 누구 빌려줬다가 지금은 증발)

영화는 간단히 요약하면 오스틴 파워즈의 흑인버전...이라고들 하더라. 흑인들을 지배하려는 The Man에 맞서는 비밀 스파이집단 브라더후드의 활약(?)을 다룬 코미디 영화. 그야말로 흑인을 위한 흑인에 의한 영화랄까... 흑인 문화 코드가 많이 들어있어서 익숙한 사람들은 정말 재밌게 볼 수 있다. (흑인들은 마요네즈를 안먹고 칠리 소스를 먹는다는 등의 믿거나말거나스러운 지식도 얻을 수 있다)

이런 영화




그런데 이 영화가 국내 개봉도 안한데다가 흑인 문화에서만 통용되는 슬랭이 나오는 등 번역하기도 난해하기 때문에, DVD의 자막이 대체로 썩 좋지 않다. 그래서 후반에 주인공이 싸우면서 흑인 뮤지션들의 이름을 필살기 이름 대신 외치는데, '어셔 펀치!' 같은 건 괜찮았지만 필살기인 날아차기를 하면서 'Earth Wind & Fire~~~~!'하고 외치는 걸 그만 '땅, 바람, 불의 이름으로~'로 번역한 것이다. (100%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이 벙찌는 자막 덕분에 Earth Wind & Fire는 나의 뇌리에 강하게 박혀버렸다. 그러나 그때는 그냥 그런 유명한 그룹이 있나보다 했던 정도였을 뿐...


그리고 올해 11월. Earth Wind & Fire의 내한 소식이 들려왔다. 거의 40년간 활동한 전설의 그룹이 최초로 내한한다길래, 형님들이 나이가 드셔서 언제 또 오실지 모른다길래, 그리고 좋아하는 영화의 주인공이 좋아하는 그룹이니까(?) 어떤 음악을 하는 그룹일까 궁금해져서 한번 찾아서 들어본 노래가



이 노래였다. 아무리 음악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어도, Earth Wind & Fire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도 이 노래는 귀에 익으리라.

헐퀴 이 노래가 이 그룹 노래였어? 하고 더 찾아보니


당연히 끝이 아니었다.



이 외에도 많은 노래들이 귀에 약간씩 익었고, 다들 라이브 공연 가서 신나게 듣기 딱 좋은 풍의 노래였다!

으악 이건 가줘야돼 해서 여친님께 노래 들려주고, 공연 오픈 열리자 마자 냅다 (같은 가격 내에서) 제일 좋은 자리로 예매!

그래서 기다리고 기다리다 공연을 보러 다녀온 것이 어제였다. 서론이 정말 길었다... 서론만 길다.


공연장 입구

멋지게 웃고 계신 형님들... 이 세분이 원조때부터 계신 멤버라고. 현재 멤버는 총 9명이던가

장소는 코엑스입니다



평소에 전시를 하던 공간에 무대를 설치하고 의자를 놓은 거라 그렇게 좋은 환경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의자의 불편함따위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첫곡인 Boogie Wonderland가 시작되자마자 전원이 의자에서 일어나버렸기 때문에...! 그리고 끝까지 한번도 앉지 않았다.

게스트도 없고, 휴식시간도 없는 논스톱 공연! (정정하시기도 해라!) 신나게 몸을 흔들고 박수치고 노래부르고 뛰다보니 어느새 공연이 끝나있었다. 워낙 공연이 꽉 차 있어서 2시간이라는 특별히 길지 않은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짧다거나 아쉽다는 느낌이 안들었다. 그냥 마음이 꽉 차버린 느낌.

더 이상 자세히 표현해도 그 시간의 열기는 전달되지 않을 것 같고... 그냥 끝나고 여친님의 손을 잡고 나오면서

'결국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건 예술과 사랑이 아닐까'

하는 뜬금없는 생각을 했다.

두말할 것 없이 올해 최고의 공연이었다.


P.S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나온 노래를 들으면서 즐거워할 수 있다니, 이럴 땐 정말 음악이나 문학을 하는 사람이 부러워진다. 창작물이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점에서...
Posted by 백승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