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심거리들/Book & Text2009. 4. 21. 18:20


휴직 직전에 서점에서 눈에 띄길래 사온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읽었습니다.

25년간 계속해 온 달리기(주로 장거리)를 소재로 그것이 자신의 소설 창작 세계에 어떻게 끼쳤는가 등의 내용을 기록한 회고록인데, 20대를 게임 개발에 투신하고 29살인 지금 휴직에 들어간 제게 인상적으로 느껴진 구절이 많이 있어서 적어봅니다.

딱히 코멘트는 하지 않겠습니다. 혹시 적은 내용에 대해 이야기를 하시고 싶으시면 개인적으로~

(소설을 쓰기 전 카페를 경영했던 것에 대한 부분입니다)
빚을 얻을 수 있는 곳에서 얻을 수 있을 만큼 얻어 썼기 때문에, 빚을 갚을 수 있을 만한 전망이 어렵사리 서게 되자, 큰 걱정은 간신히 덜게 되었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어쨌든 살아남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 손님들에게 얼굴을 내놓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 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안중에 없었다. 인생의 가파른 계단 하나를 가까스로 오르고 나서, 조금쯤은 트인 장소로 나온 기분이 들었다. 여기까지 헤쳐 나온 이상 앞으로는 어떻게 잘 되어갈 것 같은 자신도 생겼다. 심호흡을 하고,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고,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며, 다음으로 나아가야 할 단계에 대해 생각했다. 서른 살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이제 더 이상 젊은이라고는 할 수 없는 나이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리고-나로서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지만-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불현듯 솟아났다.

그러나 울트라 마라톤(100km를 뛰는 마라톤을 말합니다)의 체험이 나로 하여금 터득하게 한 여러 가지 것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것은,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이었다. 내가 갖게 된 것은 어떤 종류의 정신적 허탈감이었다. 문득 떠오른 것은 '러너스 블루'라고나 할 만한 것이, 엷은 필름처럼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울트라 마라톤을 달리고 난 뒤에 나는 달린다는 행위 자체에 대해서 이전처럼 자연스런 열의를 가질 수 없게 되어버린 듯했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육체적인 피로를 여간해서 풀기 어려웠다는 것도 있지만, 그것만이 아니었다. '달리고 싶다'라는 의욕이 내 안에서 이전처럼 명확하게 보이지 않게 된 것이다.

프레임에는 '18 'til i die'라고 쓰여 있다. 브라이언 아담스의 히트곡 <죽는 날까지 열여덟 살>의 제목을 차용했다. 물론 조크다. 죽는 날까지 열여덟 살로 있으려면 열여덟 살에 죽지 않으면 안 된다.
Posted by 백승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