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14일, 암 투병중이시던 아버지께서 세상을 뜨셨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더 잊어버리기 전에 (이 블로그의 이름대로) 기억을 남겨볼까 싶습니다.
아무래도 길고 어둡고 꿀꿀한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읽기를 권해드려도 될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모를 위로 리플에 대한 압박 혹은 악플에 대비해서 리플 기능은 막아두겠습니다.
개인적인 내용이니 반말로 쓰겠습니다.
-----------------------------------------------------------------------------
3월 3일 화요일 점심. 어머니께 전화가 왔다. 아버지께서 자꾸 기억을 깜빡깜빡 하신다고...
아버지께서는 2년 전에 폐암 3기 진단 받으시고 수술과 항암치료를 받으신 뒤, 집에서 투약하시고 통원치료를 받고 계셨던 상황.
어머니께서는 응급실 가서라도 빨리 검사 받아보셔야 되는거 아닌가 하시는데 아버지께서는 괜찮으니 병원에 안가시겠다고 고집을 피우신단다. 그래도 가끔 뭐 기억 못하실수도 있지 무슨 일이야 있겠냐 싶었는데...
-----------------------------------------------------------------------------
다음날 아침 한쪽손에 가벼운 마비가 오셔서 큰누나가 아버지를 모시고 응급실로 갔다. 나도 퇴근 후에 가보니 여전히 응급실에서 대기중이신 상태... 아무래도 응급실 의사는 뇌로 암이 전이된 것 같다고. 아버지께서는 계속 집으로 가자고 고집 피우시고.. 말씀하시는 것도 조금씩 상황에 안맞는 말씀을 하시고... 여기가 어디인지도 자꾸 헷갈리시는 것 같았다.
아버지께서도 내심 상황이 안좋다는걸 예감하셨는지 한숨을 쉬시면서 '내가 지난 2년간 힘들어도 나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살았는데 이렇게 되니 더 이상 희망이 안느껴지는구나...' 하시는 말씀... 나도 목이 메여서 겨우 '아버지 그래도 손주는 보셔야죠...' 했더니 웃으시며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야 영광이지..' 하셨던 것이 기억이 난다.
그리고 아내와 내가 곁에 있을 때 갑자기 '나중에 아빠 하루에 한번씩만 생각해줘 그거면 돼...'하는 말씀을 하셔서 아이고 별 말씀을 다하세요 하고 잊고 있었는데.. 이 글을 쓰다가 생각이 났다. 아버지께서 본인 사후에 어떻게 해달라는 유언같은 말씀을 전혀 못 남기시고 떠나셨는데, 결국 이 말씀이 내 마음속에는 유언처럼 남게 되었다.
그래도 자동차 좋아하시는 아버지 기운 나게 해드리려고 투싼 신형 발표된것 사진도 보여드리고 자동차 이야기를 좀 했는데, 지금 차 (제네시스)를 4륜구동으로 바꿀까 싶어서 알아봤더니 중고가를 너무 안쳐주더라 하시는 이야기... 그리고 요즘 작은 SUV들이 좋아보이신다길래 좀 작은 차로 바꿔서 어머니도 운전 하시면 좋을것 같다 말씀드렸더니 아버지도 그렇게 생각하셔서 본인께서 몸이 더 안좋아지시면 어머니께서 운전을 하셔야되지 않겠냐고 말씀드렸더니 어머니께서는 그런 안좋은 경우는 생각 안하려고 한다고 하셨단다.
내가 이날 생각했던건 아버지 젊었을때 이야기를 듣고 싶었는데 그걸 왜 지금까지 안했을까... 하는 후회. 그리고 아버지의 모습과 목소리를 동영상으로 제대로 찍어둔게 있던가? 나중에 아버지의 목소리가 제대로 생각이 안나면 어떡하지? 이런 생각을 했었다. 총명하시던 평소와 달리 갑자기 두서없는 말씀을 하시는 아버지를 보고 겁이 많이 났던 모양이다.
나중에 집에 들어와서 내 결혼식때 웨딩영상중에 아버지의 코멘트를 딴 영상이 있는 걸 알고 조금이나마 안심했다.
아무튼 그렇게 밤까지 기다렸더니 응급실 안에 자리가 나서 눕혀드리고, 어머니만 남아계시고 우리는 일단 집으로...
-----------------------------------------------------------------------------
다음날 (목요일) 저녁이 되서야 2인실이 나서 정식 입원하실 수 있었다. 추우실까 싶어서 집에서 잘 쓰고 있던 두툼한 극세사 담요를 챙겨갔는데, 결국 이 담요는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직전에 덮고 계시던 이불이 되었다...
이때 마트에서 이런저런 과자도 많이 사갔는데 결국 병원에 남은 짐 정리할 때까지 그대로 있던 과자도 있었고...
아버지께서는 계속 어머니께 화도 내고 집에도 가겠다고 하셔서 어머니께서 많이 힘들어하시는 중. 아무래도 그동안 비싼 약을 드시고 몸 관리도 잘 하셨는데 이렇게 되신것에 화도 많이 나시고, 또 정신도 맑지 않으셔서 그런것 같았다.
그래도 항상 자식들에게는 항상 자상한 아버지셨던만큼 우리들 앞에서는 얌전해지시는 모습...
일단 뇌 전이 판정이 났고, 방사선 치료를 하기로 결정된 상태.
10번을 한다길래, 이때만 해도 어쨌거나 열흘정도 뒤면 퇴원하실 수 있겠구나 생각하고 있었다.
기억이 오락가락 하시는 건 뇌 전이 때문인데, 단순히 암세포가 뇌를 압박해서인지 아니면 이미 뇌가 손상을 받은 상태인지는 치료를 해봐야 안다고...
퇴원을 하셔도 예전같지는 않으실 수도 있겠구나 이제 아버지와 깊이있는 대화를 더는 나눌 수 없게 되는걸까.. 아직 배울게 많이 남았는데...
-----------------------------------------------------------------------------
금요일 저녁, 아버지께서 생태탕이 드시고 싶다 하셨다. 어떻게든 드시게 해드리고 싶어서 병원에서 그나마 가까운 양재기 생태탕이라는 곳으로 바로 가봤다. 문의를 해보니 원래는 끓여먹을 수 있게 재료만 포장해줄 수 있지만, 병원으로 가는거라고 하니 아주머니들께서 어떻게든 지혜를 짜내서 뜨거운 냄비째로 포장을 해주셨다. 냄비값은 만원을 맡겨놓고 나중에 반납하면 돌려주시기로... 이날은 아주머니들께 정말 큰 신세를 졌다. 나중에 한번 먹으러 가야 될텐데.
다행히 식기 전에 가져갈 수 있었고, 아버지께서는 이미 저녁을 드신 상태셨지만 그래도 생태탕도 많이 더 드셨다. 결국 이게 아버지께 내가 사드린 마지막 맛있는 음식이 되고 말았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건 입원하시기 전, 구정 직후에 병원에 검사받으러 가실 일이 있으셔서 그 전날 응원하는 의미로 아내와 함께 부모님께 중식집에 가서 맛있는 것들을 사드렸던 일. 구정 연휴 첫날에도 가서 뵀던지라 이때 또 갈까 말까 고민을 했는데, 정말 가길 잘했다 잘했다 하고 몇번을 생각했는지 모른다.
아버지께서는 자꾸 지금 계신 곳이 중국이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그래서 간호사들에게 저사람들이 자기에게 사기를 치려 한다 말씀하시고 어머니께서 정정해주시면 화를 내시고...
이날은 어머니와 함께 병원에서 잤다. 간이침대가 하나라서 침낭을 깔고 바닥에서 잤는데, 그 와중에서 아버지께서 춥다고 감기 걸린다고 걱정을 해주시던게 생각난다.
-----------------------------------------------------------------------------
이 글을 쓰는게 생각보다 더 힘든 일이라는 걸 깨닫고 있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한 이후로 겨우 잠잠해졌던 마음이 다시 요동치면서 많은 것들이 다시 생각나고 있다. 사실 잠잠해진게 아니라 잠잠해진 것처럼 보였던 것 뿐이겠지만...
그래도 쓰지 않으면 나중에 더 큰 후회를 할테니 빨리 쓸 수밖에 없겠다
-----------------------------------------------------------------------------
언제쯤이었나, 아직 의사소통이 가능하실 때 작은누나와 함께 있을때 아버지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다. 너희들이 다 좋은 짝 찾는걸 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서 아쉽다고... (우리 삼남매중 막내인 나만 결혼을 했다) 아버지께서 평소에 말씀은 잘 안하셨지만 그게 그렇게 아쉬우셨구나... 그런데도 누나들이 살고 싶은대로 살게 해 주고 싶으셔서 내색을 안하고 계셨구나.. 싶어서 마음이 짠했다.
토요일이었나 일요일쯤이었나에는 아버지께서 잠깐 바람을 쐬러 나가자고 하셨다. 부축해서 병원 밖 쉼터에서 쉬게 해드리니, 여기가 그동안 통원 치료했던 그 병원이구나.. 내가 지금까지 왜 멀리 와있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하고 말씀하셨다. 몸은 급하게 약해지시는 것 같지만 그래도 정신이 좀 맑아지시나 해서 안심이 됐다.
어느 날인가는 갔더니 오늘은 보리(부모님께서 키우는 강아지)를 봤다고 하시길래 또 무슨 말씀을 하시나... 하고 걱정을 했는데 알고보니 큰누나가 자동차로 잠깐 보리를 데려와서 아버지께서 주차장으로 가서 잠깐 보신거라고 해서 안심을 했다. 그런데 보리가 늙어서 눈이 잘 안보이고, 아버지도 병원냄새가 많이 나시고 목소리도 쉬셨다보니 보리가 잘 알아보지 못했다고 해서 안타까웠다.
작은누나의 제안으로 부모님댁에 핸드폰으로 볼 수 있는 애완동물용 CCTV를 설치했다. 이때는 설치하고 며칠 안쓰게 되겠구나 하고 생각했었는데...
-----------------------------------------------------------------------------
3월 11일 입원 일주일째쯤... 아버지께서 중심을 잘 못잡으시기 시작하셨다. 앉아있다가도 자꾸 옆으로 쓰러지시고, 혼자 서질 못하셨다. 의사 말로는 암세포가 뇌를 압박해서 그런거라고... 그리고 목이 쉬셔서 말씀도 점점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자꾸 혼자서 서보겠다고 고집을 피우셔서 어머니께서는 더 힘들어하시고.. 한번은 무리하세 서시려다가 엉덩방아도 찧으셨단다. 어디 부러지시면 큰일나는데...
이 시기에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후회가 없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부모님이랑 한상 자식들에게 가르침을 주는 존재이구나 하는 생각도 했고...
-----------------------------------------------------------------------------
3월 12일 목요일. 아버지께서 수술을 하시게 되었다. 지금 척수액에도 암세포가 퍼져있어서 머리에 관을 꽂아서 척수액에 직접 항암제를 투여하고, 뇌압이 너무 높아서 액도 좀 빼서 뇌압을 낮춰줘야 한다고.. 그래서 관을 꽂는 수술이었다.
마침 그 이야기가 나왔을 때 내가 있던 때라,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를 휠체어로 병원 내 이발소에 모시고 가서 머리를 다 깎아드렸다. 그리고 의사에게 수술 위험성에 대해 듣고 동의서에 서명을 하는데, 지금 상황이 치료가 없으면 3개월 정도밖에 못가실 정도로 안좋으실 상태라고... 그럼 수술을 하시면 얼마나 사실 수 있을까. 6개월? 12개월? 손주 보실 때까지는 버티실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많이 했다.
이날은 2인실에서 1인실로 옮겼던 날이라 수술을 마치신 뒤에는 1인실로 오셨다. 다행히 수술은 잘 되었다고 했다.
-----------------------------------------------------------------------------
부모님댁에 늙어서 아침저녁으로 밥과 약을 줘야 되는 강아지 보리가 있다보니, 삼남매중 한명은 병원, 한명은 부모님댁 한명만 오프 이런식으로 돌아가면서 맡았다.
빡센 일정이었지만 그나마 형제가 셋이라 다행이다... 하고 생각했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나마 부모님께서 가까운 곳에 살고 계셔서 다행이지 만약에 지방에 계셨으면 어떻게 해야 했을까? 이런 생각도 많이 했고...
힘들지만 그래도 이렇지 않아서 다행이다 저렇지 않아서 다행이다 하는 얘기를 많이 했다. 그나마 힘든 상황에서도 희망을 찾기 위한 몸부림이었을지도...
그리고 불행이자 다행이었던게 3월 11일 회사에서 만드는 게임에 큰 업데이트가 있어서 그 직전에는 거의 병원에 가지 못했는데, 이전에 그 업데이트 준비로 너무 바빠서 구정 휴가를 반납했던 것의 대체 휴가를 받을 수 있었던 것. 그 덕분에 휴가를 며칠 쓰고 병원에 시간을 많이 쓸 수 있었다.
언제쯤이었나, 아버지께서 아직 말씀을 하실 수 있으실 때... 본인 몸도 잘 못 가누시면서 우리들에게 빨리 들어가라 그러다 병난다... 하셨던 때가 있었다. 그 와중에도 자식들 걱정을 하시는 모습에 울컥해서 화장실에 가서 많이 울었다.
-----------------------------------------------------------------------------
3월 14일 토요일. 어머니 생신이셨다. 아무리 그래도 그냥 넘어가는건 좀 아닌 것 같아서 케익을 사서 병원에서 아버지의 완쾌도 기원하며 같이 잘랐다. 아버지는 기대만큼 즐거워하진 않으셨다...
-----------------------------------------------------------------------------
어머니께서는 아버지께 밥을 떠드리면서 이거 빨리 먹고 기운내서 집으로 돌아가자... 이런 말씀을 많이 하셨다. 어머니께 아버지와 함께 가정을 꾸려온 집이란게 어떤 의미셨을지.. 무슨 마음으로 그 말씀을 하셨을지...
-----------------------------------------------------------------------------
3월 21일 토요일. 예전에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댁에서 집안일 해주시면서 병수발도 해주셨던 조선족 아주머니께서 병간호를 위해 와주셨다. 3년 전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이후 다른 일도 하셨다가 중국에도 다시 돌아가셨다가 하셨는데 마침 지금 일도 없으시고 한국에도 와계셔서 와주신것. 마침 그 사이에 요양원 같은데서 병수발하는 일도 하셨어서 몸을 못가누는 환자 수발하는 법을 잘 아셨기 때문에.. 정말 구세주같은 존재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그나마 이때부터는 우리가 병원에서 잘 필요는 없이 저녁때 병문안만 가고 보리만 봐주면 되게 되서 한결 수월해졌다.
아버지는 방사선 치료와 항암치료를 같이 받고 계신 상태.
아버지께서는 이때쯤부터 주무시는 시간이 상당히 길어지셨고, 식사량도 줄어들고 목소리가 거의 안나오셔서 의사표현이 힘드신 상태가 되셨다. 의사 말로는 역시 뇌 전이 때문에 마비가 된 것인데, 나중에 치료해도 되니 일단 지켜보자고...
이때문에 결국 이후로 아버지와는 제대로 된 의사소통을 할 수 없었다. 아버지께서 마지막까지 얼마나 맑은 정신으로, 무슨 생각을 하시다가 가셨는지 알 수 없는게 큰 아쉬움 중 하나이지만... 어쩌면 아버지의 생각을 다 들었다면 그게 더 힘들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긴 한다.
-----------------------------------------------------------------------------
3월 23일 월요일. 아버지께서 마지막 방사선 치료 가시다가 구토를 하시는 바람에 (음식물이 폐로 들어가면 폐렴이 될까봐) 석션을 하셨다고. 이날 이후 뭐 드시다가 기도로 들어갈까봐 금식 판정이 내려졌다.
그 이후로 아버지의 다리가 너무 급속도로 야위어가서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와중에 보리도 갑자기 기침을 엄청나게 해대서 누나가 병원을 데려갔다. 심장이 약해져서 그런거라고... 먹는 약이 더 늘어났다. 아무래도 부모님이 안계시니까 스트레스가 많았던 모양.
-----------------------------------------------------------------------------
3월 25일의 대화를 보니 아버지께서 '많이 좋아지셔서' 우리를 알아보고 웃기도 하셨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 이미 그정도로 많이 쇠약해진 상태셨구나...
어디까지가 암의 영향이고 어디까지가 치료가 힘들어서셨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정말 처음에 비틀거리면서라도 같이 운동하려 걸었던 걸 그리워하게 될 정도로 안좋아지실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던지라 그때가 그립게 느껴졌다.
-----------------------------------------------------------------------------
3월 30일 월요일. 코를 통해서 위로 연결되는 관을 넣으셔서 이걸로 식사를 하시기 시작했다. 힘들어 보이기도 했지만 그래도 아무것도 못 드실 때 보다는 영양 섭취가 나아지셔서 회복이 좀 더 빨라지시지 않을까...
이날은 아버지 생신이셨다. 큰소리로 아버지 생신 축하드려요 외치긴 했는데 알아 들으셨는지 어떠셨는지... 당연히 케익은 자르지 못했다.
비록 좋지 않으신 상태의 모습이시지만 아버지께서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오시건 아니시건간에 한장 정도는 남겨두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 싶어 주무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몰래 사진으로 담았다.
-----------------------------------------------------------------------------
4월 4일 토요일. 이날은 아주머니께서 집에 가시는 날이라 어머니와 내가 병원에서 자는 날이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자꾸 잠결에 콧줄을 빼신다고 하시더니 오늘 밤에도 어느새 빼버리셨다. 줄이 길어서 빼는것도 힘드셨을텐데 참...
이때는 이것이 그렇게 큰 일이 될 줄은 상상도 못했었는데.
-----------------------------------------------------------------------------
4월 5일 일요일. 아침에 당직 의사가 와서 콧줄을 끼우는데 너무 괴로워하시더니, 그 다음에 식사를 할 때도 계속 힘들어하셨다. 아무래도 이상해서 간호사를 불러다가 엑스레이를 찍어보니 관이 잘못 들어갔다고... 다시 빼고 다시 꽂았다.
그리고는 간호사가 이럴때에 대비해서 환자의 손에 씌우는 장갑같은게 있다고 알려줬는데...
만약에 간호사가 그 사실을 미리 알려줬거나 어디서 검색해서 알아냈더라면 아버지는 아직 살아계셨을까?
모르겠다... 그리고 그게 더 좋은 일이었을지 어떨지조차도 잘 모르겠다.
-----------------------------------------------------------------------------
4월 6일 월요일. 아버지께서 어제 콧줄 잘못 넣은 것 때문에 폐렴기운이 있으셔서 산소 공급기를 다시고 항생제도 맞기 시작하셨다고. 그렇게 심해보이지는 않으시다길래 나으시겠거니 했는데...
-----------------------------------------------------------------------------
4월 10일 금요일. 어머니께서 허벅지에 났던 혹이 점점 아프시대서 병원에 가셨다가, 절제 수술을 받으시기로 한 날이었다.
나는 목요일, 금요일에 오후 반차를 내고 병원에 아주머니와 함께 아버지를 간호하고 있었다. 사실 할 일이 많은건 아니었지만...
오후에 연락이 왔는데 어머니 허벅지 혹이 악성 종양일 수 있어서 절제를 안하고 조직검사용으로 떼어내기만 했단다.
아버지도 이런 상황인데 어머니까지 암일 수도 있다고...? 정말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는 삼남매가 힘을 합쳐서, 서로 미루거나 싸우지 않고 잘 해왔다고 생각하지만... 이 생활이 앞으로 계속 길어져도 그렇게 잘 할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아내는 퇴근 후 어머니 병원에 가고, 나도 저녁 8시쯤에 어머니 병원으로 갔다가 아내와 같이 집에 들어왔다.
-----------------------------------------------------------------------------
4월 11일 토요일, 하루 종일 아버지와 함께 있었다. 이때 큰삼촌과 큰외숙모께서 문병을 오셨는데, 간만에 손님도 알아보시고 말을 걸면 고개도 끄덕거리시는 것이 지난 며칠에 비해서 많이 좋아지신 느낌이었다. 이제는 암 치료도 다 되었다고 하니 다음주에 열심히 회복하시면 퇴원하실 수 있겠지. 그 다음이 더 힘들 수도 있겠지만... 하고 생각했었다.
회사 일이 너무 많은데 이틀이나 반차를 써야 됐기 때문에 작은 노트북을 병실에 들고와서 짬짬히 문서 작업을 했는데, 혹시 아버지께서 그 모습을 보고 서운해하시진 않으셨을까..? 그런 생각이 좀 들기도 한다. 그래도 그 하루동안 아버지와 긴 시간을 같이 보낼 수 있었던게 다행이다 싶은 마음이 더 크다...
-----------------------------------------------------------------------------
4월 12일 일요일. 어머니께서 계획보다 빨리 (절제 수술을 안해서) 퇴원하셨기 때문에 나는 아내와 집에서 쉬고, 누나들이 오전 오후로 아버지를 간호하고 어머니는 잠시 병원에 왔다 가실 예정이었다.
이날 오전까지는 토요일보다 더 상태가 좋아지셔서 많이 웃기도 하셨다고... 그 모습을 봤으면 좋았을텐데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그런데 오후에 갑자기 산소 포화도가 떨어져서 석션을 하고 엑스레이를 찍으셨다고... 마침 딱 어머니께서 오신 직후에 그렇게 되셨다. 혹시 어머니 오실 때까지 버티셨던 걸까... 그런 생각도 들고.
-----------------------------------------------------------------------------
4월 13일 월요일, 회사에 출근해서 일을 하는데 오후에 큰누나에게 전화가 왔다. 아버지 폐렴에 걸리셔서 상태가 많이 안좋으시다고... 의사가 말하는게 아무래도 보내드릴 각오를 하란 말을 돌려서 말하는 것 같다고.
아... 지금 하던 작업을 4월 말까지 빡빡한 일정으로 끝내야 되는데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급하게 휴직 후 그날부터 출근하신 분께 하던 작업의 인수를 부탁드리고 (죄송스러운 일이다) 퇴근을 했다.
그리고 병원으로 갔는데, 그때부터 산소 포화도가 갑자기 막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들과 며느리가 올 때까지 힘들게 버티고 계셨던걸까?
고압 산소를 계속 넣는데도 포화도가 잘 오르지 않는 상황... 아버지는 눈은 뜨고 계시지만 얼마나 정신이 맑으신 상태이실지... 가족들에 곁에서 가슴을 두드려드리며 코로 깊게 숨을 쉬어보시라고 소리쳤다. 포화도는 내려가다가 다시 조금 오르다가 또 내려가다가를 반복하고.. 결국 부작용을 감수하고 고압 산소의 산소압을 더 올렸다. 그것 외에는 할 수 있는게 없다고...
아버지께서 힘드신지 자꾸 눈을 감고 주무시려 하셔서 깨어나서 힘껏 숨 좀 쉬시라고 말하는데, 누나들의 목소리에는 계속 눈을 감고 계시다가 내가 '아빠 눈 좀 떠보세요!' 하니까 눈을 번쩍 뜨셨다. 그 이후로도 몇번을 그러셔서 큰누나가 아들이 그렇게 좋으세요? 딸 서운하게~ 했는데... 평소 아들딸 차별 없이 대하신 아버지셨지만 그래도 아버지께는 막내아들이 조금 더 특별하셨을까? 생각하니 가슴도 찡하고 그만큼 사랑에 보답해드렸나 싶어서 맘이 아프기도 하고... 물론 그냥 내 목소리가 좀 더 저음이라서 무의식중에 잘 들리셨을지도 모르겠다고도 생각하고 있다.
내가 아버지 불렀을때 잠깐 눈 떠서 웃으셨다고도 하는데 나는 그 모습을 못보고 아내만 봤다. 아쉽지만 아내가 대신 봐 주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야겠지...
그리고 아내가 아버지 가슴 두드려드리면서 아버님 눈 좀 떠보세요! 하고 계속 외쳤는데 평소에 그렇게 큰 목소리 잘 안내는 사람이라 그 모습이 또 고맙고 짠하고.. 지금도 생생하게 그 목소리가 기억이 난다.
그리고 의사가 어머니와 나를 불러서 지금보다 상태가 더 안좋아지실 때 어떻게 할지 동의서를 써야 한다고 했다. 지금보다 더 안좋아지시면 중환자실로 간 뒤 삽관을 해서 인공적으로 호흡을 해야 되는데 그 경우 더 좋아질 가능성은 희박하고 연명하는 것 뿐.. 그리고 더 이상 면회는 불가능하다고. 이미 가족들하고 이야기도 했었지만 어머니께서 마지막으로 한번 더 물어보시길래 나는 아버지 가시는 길 우리가 곁에서 지켜봐드리고 싶다고.. 그렇게 말씀을 드리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결국 삽관이나 심폐소생술은 하지 않기로 결정을 하고, 사인을 했다.
밤 10시쯤 산소 포화도가 80대 중반에서 안정되고, 이 상태면 아마 오늘 밤은 괜찮으실 것 같다고 해서 일단 직장을 쉬기 힘든 아내는 큰삼촌과 함께 집에 들어보내고, 남은 가족들은 교대로 자면서 아버지 상황을 보기로 했다.
아래는 그때 누워서 핸드폰으로 쓴 글. 그대로 올려본다
-----------------------------------------------------------------------------
그저께까지 호전되는 기미가 보이셨던 아버지의 상태가 갑자기 어제부터 안좋아지셨다 폐렴이 왔다고 한다
한달전 아버지께서 기억장애가 오셔서 응급실에 왔을때 자꾸 딴소리를 하시는게 마음이 아팠지만 그래도 움직임은 괜찮으셨는데
약간 비틀비틀하시면서도 부축해서 산책하던 그날을 그리워하게 될 줄이야
아버지께 이렇게 해드릴걸 하는 많은 후회가 생긴다
젊은시절 이야기 많이 들을걸
모시고 가까운데 바람이라도 쐬러 나갈걸
미연씨 운전하시는데 태워드릴걸 대견해 하셨을텐데
좀더 자주 찾아뵐걸
집에도 더 많이 초대해드릴걸
손주구경 시켜드릴 수 있으면 좋았을텐데
그래도 한편으로는 잘해드린 많은 것들도 생각난다
서울대 들어가서 기쁘게 해드린것
환갑선물로 차 사드린것
돈 벌어서 걱정 덜어드린것
결혼하는 모습 보여드린것
미연씨도 함께 가족여행 간 것
결혼기념일 선물로 경주 여행 보내드린것
미연씨가 용돈 많이 드려서 뭐살까 고민하시게 해드린것
입원 전 마지막 검사전에 맛있는것 사드리고 옷 선물 받아온것
그러나 결국 다 내 욕심이고 만족일 뿐 떠나시는 아버지의 마음은 알 수 없다 뭐가 좋으셨고 뭐가 후회되시는지는 아버지만 아시겠지
산소 포화도가 떨어지는데 자꾸 주무시려는 아버지
유난히 내 목소리에 반응해서 눈 뜨시는게 맘이 짠하다 사랑받은 만큼 좋은 아들이었을까?
중환자실 치료는 거부했다 더 힘들고 외롭기만 하실 것 같아서.. 힘들더라도 곁에서 가시는 길 지켜드리고 싶다
(아래는 다음날 새벽에 덧붙인 글)
한시간정도 눈을 붙이고 12시쯤 일어났을때 숨쉬는 간격이 점점 길어지시더니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
우리가 힘들까봐 밤 늦기 전에 가신걸까
그래도 이제는 아프지 않으실거라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은 편하다
-----------------------------------------------------------------------------
누나가 나를 황급히 깨워서 시간을 보니 11시 50분 정도... 갑자기 산소 포화도가 다시 떨어지셨다고 한다. 그러고서는 간호사와 의사를 불렀지만 어떻게 조치할 시간도 없이 숨 쉬는 간격이 점점 길어지시더니 12시가 넘자마자 세상을 뜨셨다. 그래도 고통을 느끼지 않으시고 잠들듯이 가신 것 같아서 위안이 됐다. 미연씨는 같이 없었지만 그래도 가족들이 가시는 순간을 지켜볼 수 있어서 다행이다 싶었다.
저녁에는 참 눈물을 많이 흘렸는데 막상 이렇게 되니 아버지께서 편안해보이셔서 그런지 예상만큼 눈물이 많이 나지 않았다. 아버지의 몸을 만지는데 아직도 따뜻한 온기가 남아있어서 실감이 나질 않았다.
슬퍼할 틈도 없이 많은 것들을 선택해야 됐다. 잔인하다 해야 할지... 아니면 가만히 슬픔에 빠져있는게 더 힘들지도.
병원 짐 정리해서 차에 싣고, 장례식장 결정하고 (그 병원에 딸린 곳으로)
장례식장을 알아보더니 30평대, 40평대, 68평이 남아있다고 하는데 이게 어느정도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검색해봐도 나오는 것도 없고...
그래서 늦은 시간이지만 몇달 전에 상을 당하셨던 지학이형에게 전화를 해서 사정을 설명하고 조언을 구했다. 손님이 많이 올 것 같으면 68평으로 하라고.. 결국 68평도 빠듯했으니 다른 선택을 했으면 큰일날 뻔.
아내도 콜택시 타고 다시 오라고 하고, 친구 상국이와 백현이, 그리고 회사의 경영기획실장님께도 전화하고...
아버지를 안치소에 모셔드리고, 아버지 핸드폰에 있던 사진중에 신분증용으로 찍으신 사진이 있어 그 사진으로 영정 사진을 하도록 전송했다. 사진을 전송하기 위해 이런저런 앱을 설치하고 있는데 참 아이러니하다 느껴졌다.
-----------------------------------------------------------------------------
다음은 장례를 치르는 동안 기억에 남는 일들..
새벽 3시쯤 이런저런 일이 준비되는 걸 보고 있는데 누나가 내 손님이 오셨다면서 나를 불렀다. 가보니 민이형이 와 계셨다.
아침에 연락해야지 하고 있었는데 경영기획실장님께서 돌리신 전체 메일을 보고 바로 달려오셨다고. 14년 반쯤 전 만나서 밤낮으로 같이 꿈을 키워나갔던 인연... 좌절도 고생도 성공도 같이 맛본 인연이 정말 끈끈하구나 싶었다.
이때 민이형이 그래도 해볼 수 있는 치료 다 해드리고 보내드린 것만해도 행복한거다 이미 아무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늦었거나 형편상 치료도 제대로 못해보는 경우도 얼마나 많은데... 하는 말씀을 해주셨는데 이게 정말 위안이 되고. 그 다음에도 잊지 않고 계속 안부 물어주신느게 고맙기도 하고...
지학이형과 종한이형도 아침부터 찾아와주셨고.. 비록 지금은 각자의 길을 걷고 있지만 역시 고생과 성공을 함께 나눈 소중한 인연들.
아버지의 핸드폰에 등록된 핸드폰 번호들로 아버지의 부고를 전하는 문자를 돌렸다. 그중에 내 핸드폰으로 온 답신 하나가 인상적이었는데, 그 문자를 받은 핸드폰의 주인께서는 몇년 전 돌아가셨고 지금 문자를 보내시는 분은 그분의 아들이라는 것. 그리고 자신이 아버지의 핸드폰 번호를 쓰고 있다는 사실과 함께 아버지의 명복을 빌어주셨다.
돌아가신 분의 핸드폰 번호를 대신 쓰면 참 불편한 일이 많을텐데 어떤 마음으로 그런 결정을 했을까... 하고 많은 생각이 들었다.
대학 동기들이 많이 와줘서 깜짝 놀랐다. 특히 대학 초기에 보고 거의 십년 넘게 보지 못한... 다른 동기들 결혼식에서도 잘 보지 못한 친구들까지 와줘서 정말 고마웠고, 내가 정말 큰 일을 겪고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 한편으로는 이게 다 갚아야 될 빚이구나, 앞으로 더 잘 해야지 하는 생각도 많이 했고.
이날 친구들에게 가장 많이 한 이야기는 고맙다, 그리고 다음에는 좋은 일로 만나자.. 였다.
대표님은 첫날 점심에 와 주셨지만 다른 회사 사람들은 잘 보이지 않아서 왜지..? 하고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니 다음날 아침이 업데이트였다. 오늘 밤은 당연히 정신 없겠구만 하고 납득이.. 다음날에 많이들 와 주셨다.
동문 후배인 아영이는 시험보러 부산에 내려가 있어서 무려 어머니께서 대신 와 주셨다. 그렇게 할 것 까지는 아닌데... 너무 고맙고 또 죄송하고.
내 결혼식 때 주례를 서 주시기도 하셨던 고등학교 은사님인 최선영 선생님께도 연락을 드리니 와 주셨다.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되서 그런지 선생님을 뵙자 마자 눈물이 왈칵 났다. 선생님께서도 나보다 더 어린 나이때 아버지를 잃으셨다는 말씀과 함께 격려를 해 주셨다.
호랑씨, 진숙씨, 장환이형도 간만에 만났다. 호랑씨, 진숙씨가 이제 우리들 셋 다 아버지가 안계시네 하면서 웃었는데, 블랙유머 같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런 힘든 일을 겪는게 나만이 아니구나 하고 생각하니 정말 위안이 많이 되었다.
미국에 있는 훈기는 전화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주더니 이럴때 같이 있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며 울먹였다. 제일 친한 친구... 그래도 이전에 내 결혼식때 우리 아버지 한번 뵀었으니 잘 됐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첫날 가장 마지막을 장식한 건 내 손님들이었다. 고등학교때부터 이어져온 나우누리 게임 제작 동호회 (NGM)의 이터니티 사람들. 아직도 다들 게임쪽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 체질 어디 안간다고 밤 늦게, 11시 넘어서까지 왔다가 12시가 넘어서 돌아갔다. 그중에 넥스트 플로어 대표인 민규는 화환까지 보내줬고.
화환 하니 생각난 건데 서울대 컴퓨터공학부 동문회에서 깃발이 와 있어서 깜짝 놀랐다. 이쪽 활동은 거의 안했던지라.. 다음에 한번정도는 동문회비를 내봐야겠군 하고 생각했다.
정말 반가운 얼굴들, 인연들을 하루만에 만나게 되니 이게 아버지께서 주시는 마지막 선물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예전에 외할아버지의 장례식때는 너무나 시간이 더디게 갔는데, 이번에는 내 손님들이 계속 와주셔서 인사를 드리다보니 시간이 금방금방 빠르게 지나갔다. 상주라서 자리를 지켜야 되다 보니 제대로 못 맞아드린게 죄송할 뿐... 특히 혼자 오신 손님은 식사를 혼자 하시게 두자니 정말 죄송스러웠다. 다음에 나도 누구의 장례식에 가면 가능하면 누구랑 같이 가야겠다고 (+봉투에 소속을 같이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주변 사람들을 잘 챙기거나 자주 연락하는 타입이 아닌데 결혼식때나 이번 일때나 이렇게 많이들 와 주시니 무슨 복인가 싶고... 더 잘 해야겠다 다짐도 하고.
둘째날에는 입관을 했다. 대렴을 하기 전에 아버지의 얼굴과 몸을 만져봤는데 너무 얼음장같이 차가워서 눈물이 났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직후에만 해도 살아계신 것처럼 따뜻했는데...
이틀이 어느새 지나가고, 상국이와 백현이가 같이 둘째날 밤을 새고 아버지 운구에 참석해줬다. (절친으로 6명을 채울 정도로 친구가 많지는 않다..) 그래도 가장 친한 친구들이 젱리 앞자리를 지켜줘서 고마웠고.
아버지께서는 생전에 원하셨던 대로 화장, 그리고 나무를 좋아하셨던 아버지가 좋아하시게 수목장으로 하기로 했다. 화장터로 가는데 내가 문득 생각이 나서 '아버지 수술하시고 나서.. 보리가 죽으면 아버지께서 그 충격 이겨내실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결국 아버지께서 먼저 가셨네..' 했더니 누나들도 그 얘기 했었다는 얘기를 했다.
화장이 끝나기를 한시간 넘게 기다렸다. 그 사이에 상국이와 백현이는 돌아가고... 화장이 끝나서 확인하러 가보니 아버지의 뼛조각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는 뼈의 형태가 남아있는 큰 것들도 있어서 이게 아버지의 뼈구나 하는 실감이 들었다. 그 뒤 뼈를 갈아서 가루로 만든 뒤 상자에 모셔지고, 그 상자는 나에게 전해졌다. 방금 태운 뼈여서 그런지 상자까지 뜨끈뜨끈했는데, 이게 아버지의 온기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마침 추운 아침이었어서 그 열기가 위안처럼 느껴졌다.
수목장을 하는 곳으로 다시 이동해서 좋은 나무 (꽤 비쌌지만 어머니께서 '지금까지 썼던 아버지 한달 약값만도 얼마인데..'하시면서 마음에 드는 곳으로 선택하셨다)를 고라서 그 아래에 모셔드리고, 제사를 지냈다. 잘 모셔드리고 돌아오는 길에 와주신 손님들과 함께 밥을 먹었는데, 밥을 먹고 나니 그제서야 비가 펑펑 쏟아졌다.
부모님은 불교셨지만 사실 나는 종교도 없고, 사후세계도 믿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께서 더 이상 아프시지 않으시다는 사실만은 확실했기에 그게 가장 큰 위안으로 다가왔다.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려고 할 때 자꾸 병원에서 초췌한 모습으로 힘들어 하시던 모습이 생각나는건 괴로웠지만, 한편으로는 그 사실이 아버지께서 더 이상 아프시지 않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해서 위안이 되기도 했다.
결국 죽음이란건, 살만큼 살았다는 생각이 들 만큼 오래, 건강하게 살다가 잠들듯이 떠나는 축복받은 경우가 아니라면 이런 저런 회환과 후회를 남길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어쨌거나 아쉬움을 뒤로 하고 보면, 멋지고 좋은 인생이었다고 생각된다. 아프고 나셔도 결국 직전까지 하고 싶은 일 하시면서 가셨으니까. 아버지께서는 아파서 요양만 하면서 사는 인생을 더 견디기 힘들어하셨으리라.
비록 일찍 가신게 아쉽지만, 인생이란게 누가 더 오래 사나 경쟁하는 건 아니니까.
-----------------------------------------------------------------------------
일주일간의 공가를 쓰고 회사로 돌아간 뒤, 5월 말까지 휴직을 하기로 했다.
앞으로 수술을 받으시게 될 어머니를 간호해야 되기도 했고, 지난 한달 반동안 회사일과 아버지 간호를 병행하느라 지친 것도 있었고. 그리고 내가 다른 분들에게 넘기고 온 일을 힘들게 하시는걸 옆에서 지켜보는것도 너무 정신적으로 힘든 일로 느껴졌다.
다행히 회사에서 배려를 잘 해주셔서 좋은 방향으로 처리되었다.
작은 누나는 세달간 휴직하기로.
어머니는 검사 결과 종양이 암으로 밝혀졌지만, 다행히 아직 다른데 전이된 부분은 없는걸로 나와서 절제 수술을 받으셨다. 이주간 입원하셨다가 얼마 전 퇴원하셨다. 어머니의 바람으로 병원은 아버지께서 입원하셨던 병원과 다른 곳으로 선택했다.
아이러니하지만 어머니의 건강을 챙기느라 아버지를 잃은 슬픔에 너무 몰입하지 않을 수 있었다. 다른 가족들도, 어머니도.
쉬면서 책장에 꽂아두고 아직 읽지 않았던 'DEATH 죽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철학서를 읽었다. 논리적인 책이라서 나에게 잘 맞았고,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생각을 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많은 아쉬움들과 슬픔이 있지만, 그 슬픔은 결국 나의 것이지 아버지의 아쉬움도 슬픔도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많이 위안이 되었다. 물론 이건 내 생각이고, 실질적으로 계속 아버지의 빈 자리를 느껴야 하는 어머니께서는 더 많은 허전함을 느끼시리라 생각된다.
작은누나가 아크릴 상자를 하나 맞춤 주문해서, 거기에 아버지께서 평소에 쓰시던 물건들과 사진을 넣어 아버지께서 묻히신 곳 앞에 놓아드렸다. 2008년에 내가 아버지 환갑 선물로 제네시스를 마련해드리고, 그 뒤에 국내에서 출시된 1:18 모델도 같이 사드렸었는데 그 모델카도 같이 들어가게 되었다. 이 선물이 이런 용도로 쓰일지는 상상도 못했었는데...
제네시스는 부담스러운 크기지만 아버지께서 마지막으로 아끼시면서 타시던 차이니만큼 어머니든 누나든 누군가가 좀 더 타게 될 것 같다.
몇달간 계속된 중압감과 스트레스로 아직 어린 아내도 감정이 폭발하는 일이 있었다. 다행히 잘 이야기해서 좋은 방향으로 풀린 것 같다.
아버지께서 잘 못해드린 부분이 많아서 후회된다는 이야기를 장모님께 하니 장모님께서 부모에게 자식이란 그런 존재가 아니고, 너희가 행복하게 사는게 가장 큰 효도라는 말씀을 해 주셨는데 그게 많은 위안이 되었다.
쓰지 않고 두었던 전자액자를 꺼내서 아버지 사진들을 모아다가 넣어서 부모님댁에 켜두었다.
사진을 정리할 때 눈물이 많이 날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생각보다 여기저기 해외여행도 많이 다녀오셨었구나 하는 생각에 위안이 되었다.
이번 일을 겪은 바가 많아서 휴직을 하자 마자 피트니스(1년)와 PT(35회)를 신청했다.
건강이 최고다..라는건 알고 있었지만, 이번 일은 내 건강이 내 것만이 아니라는 것. 결국 내가 건강을 잃으면 아내와 가족, 주변 사람들을 불행하고 힘들게 만들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또 한편으로는 내가 주변 사람들을 잘 챙기면서도 내가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도 잘 하려면 결국 체력을 기르는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도 많이 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아버지께서 입원하셨을 때 식사를 못 하셔서 체중이 빠지시는 걸 보고, 지금 한없이 가벼운 내 체중으로는 저런 상황을 견딜 수 없을 것 같다는 것.. 결국 아플 때 치료를 이겨내고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최소한 어느 정도의 체중을 만들어야 겠다는 생각도 했다.
아무튼 현재로서 운동은 힘들지만 보람이 있다. 꾸준히 해야지.
그리고 한편으로는 진작에 운동을 해서 좀 더 건강해진 모습을 아버지께 보여드렸다면 기뻐하셨을텐데 하는 생각도 했다.
유효기간인 한달이 거의 되어갈 때 쯤 동사무소에 가서 아버지의 사망 신고를 했다. 생각보다 간단하고, 별 것 없는 간단한 절차였다.
-----------------------------------------------------------------------------
일단 여기에서 마무리 해야 될 것 같다. 여기까지 쓰는데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손이 잘 가지 않기도 했고, 쓰다가도 정신적인 피로가 커서 자주 중단하기도 했고.
나중에 보면 어떤 느낌일지 모르지만 아무튼 이번 일의 기록을 여기에 이렇게 남겨둔다.
아마 써야지 하고 생각한 것 중에 빼먹은게 꽤 있을 것 같은데, 나중에 생각나면 보충할지도 모르겠다.
2015.4.26~2015.5.20
-----------------------------------------------------------------------------
2015. 5. 22 추가
지난 4년 정도 동안 잡지 톱기어와 스터프를 정기구독했었다.
결혼 전에도 자동차와 새로운 기기를 좋아하시는 아버지와 같이 봤었고, 결혼 후에도 내가 본 뒤에 아버지께 갖다드려서 같이 보았는데.
약속이라도 한 듯이 작년 말에 두 잡지 모두 폐간되고 말았다. 그래서 올해부터는 톱기어 대신 모터 트렌드를 몇권 샀었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모터 트렌드를 아이패드로 구독하는 것이 훨씬 저렴하고 편리함에도 불구하고 종이 잡지를 샀던 건 아버지도 같이 보기 때문이었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졌으니..
톱기어, 스터프, 그리고 아버지의 떠남과 함께 내 종이 잡지 생활도 끝이 났구나 싶다.
-----------------------------------------------------------------------------
2015. 5. 22 추가
위에 쓴 내용과도 겹치긴 하지만, 아버지께서 떠나신 것이 내게 어떤 의미인가에 대해 내가 생각하고 생각해서 다다른 결론은 다음과 같다.
일단 아버지는 지금 괜찮으시다. 돌아가셨으니 (그리고 나는 사후 세계를 믿지 않으니) 이제 괴로움도 후회도 아쉬움도 노여움도 느끼지 않으실 것이고, 이건 괜찮다고 표현해도 되리라.
그렇다면, 아버지께서 괜찮으시니 나도 괜찮다.
아버지께서 괜찮으시니 나도 괜찮다.는 말에 대해서는 부연이 좀 필요한데, 예를 들어 생전에 아버지께서 5년정도 여행을 다녀오려고 하는데 괜찮냐? 라고 말씀하셨다면 나는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5년동안 아버지를 뵙지 못하는건 조금 아쉽긴 하겠지만, 아버지께서 괜찮으시다면 저는 괜찮습니다. 다녀오세요. 라고.
마찬가지 맥락으로, 아버지는 떠나셨지만, 그래서 더 이상 뵐 수 없는건 아쉽지만, 아버지께서 괜찮으시다면 나도 괜찮다.
이게 현재 내가 다다른 결론이다.